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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의 천재를 깨워라 - 임동창 음악학교

2007/12/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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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 선생님으로 변신한 작곡가 임동창과 삶을 바꾸는 음악학교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본디 아름다웠으나 서로를 만나 비로소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과연 누구의 아름다움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아름다운 스승부터? 혹은 아름다운 제자부터? 아니면 아름다운 공무원의 이야기부터?

지난 11월 17일 토요일,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임동창이 중학교 음악선생님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곤 제자가 발표회를 여니 놀러 가자는 선배의 제안을 받았다. 서울에서 3시간 거리인 충남 서천군 기산면 동강중학교가 갑작스러운 여행의 목적지였다.

희한한 발표회

도시보다 이른 땅거미가 내려앉은 동강중학교 강당은 시골 여느 학교가 그렇듯 교실 두 개를 이어 붙여 소박했다. 그때만 해도 임동창이 대단한 음악영재를 발견했겠거니 생각했다. 발목 높이쯤 올라오는 무대 위에는 마침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도 있었다.

하지만 강당 안 두 개의 벽면과 가로놓인 탁자 한 개 위에는, 여러 장의 그림과 악보와 편지, 직접 손으로 촘촘히 써 내려간 여러권의 공책, 30여 묶음은 족히 넘어 보이는 자그마한 스케치북, 그리고 습작소설을 담은 인쇄물까지, 온갖 것이 걸리고 매달리고 붙여지고 펼쳐져 있었다.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나? 그림공부를 했다는 얘길까? 아니면 소설 쓰는 공부를 했나? 도무지 뭘 공부했는지, 무슨 발표를 하려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주인공이 무대에 오르면 모든 의문이 해소되겠거니 생각하고 기다리자 싶었다.

임동창은 분주했다. 시원하게 밀어버린 머리는 TV에서 봐온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체구는 생각보다 작았다. “이따 발표가 끝나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봐 주소. 그리고 애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지 그냥 느낀 대로 이야기해 줘요.” 손님을 맞이하며 제자의 작품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그는 마치 자신이 첫 발표회를 여는 듯 조금은 상기돼 보였다.

형광등이 꺼지고 무대 위 조명만 남았다. 또 한 번 어리둥절했다. 중학교 발표회라기에 열댓 살 먹은 아이가 주인공이겠거니 했지만 난데없이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았을 아가씨가 날렵하게 무대에 올랐다. 송도혜(28).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결혼해도 좋을 나이에 중학교라니? 대체 무슨 발표를 하려고?

무대에 오르기에 앞서 그가 나눠준 아홉 장짜리 발표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 저는 늘 내가 누구일까,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행복할까 하는 의문은 품고 살아왔습니다…. 지난 27년 동안 내 의지가 아닌 듯한 무언가에 이끌려 살았고 스스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테리어 회사를 다니면서도 왠지 내 길이 아닌 듯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렸고 급기야는 어느 날엔가 목까지 차오르는 답답함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마치 신앙을 간증하듯 스스로 자처한 고된 탐구의 시간과 스승 임동창과의 만남, 그리고 그 후 1년의 이야기를 자분자분 풀어놓았다. 객석에는 그의 부모님, 동강중학교에서 정체 모를 공부를 함께 하는 다양한 연령대의 동료 학생들, 또 그들의 부모 등 50여 명이 있었다.

도 혜는 지난해 초 임동창을 처음 만나 긴 얘기를 나눴고 뭔지 모를 확신에 이끌려 친구와 함께 그를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괜찮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

그 때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세상에서 도태되고 결국 어리석은 후회만 남는다는 훈육에만 익숙했던 도혜에게 임동창의 그 한마디는 묵은 체증을 해소하는 청량제와 같았다. 그래서 여행 아흐레째 임동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직장을 때려치우고 고향 전주에 내려가 어릴 때 치다만 피아노부터 손을 댔다.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에 ‘꽂혀버린’ 도혜는 하루에 10시간이 넘도록 피아노만 두드렸다.

하지만 그런 딸을 바라보는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달래다 결국에는 포기하고 피아노 소리에 원성이 자자한 아파트 이웃들을 구슬리려 어머니는 음식을 해 나르고 아버지는 방음벽을 만들었다.

두 달 반을 피아노만 치던 도혜는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소설도 한 편 썼다. 여기에는 스승의 응원이 크게 한몫했다.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온 스승 임동창은 “피아노가 아직도 좋으냐”고 물었다.

처 음에는 겨우 두 달여 만에 싫증을 낸 자신을 들킬까 싶어 여전히 좋다고 했지만 결국 솔직하게 고백을 했다. 그러자 스승은 크게 웃으며 “자기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남이 찾아주지 않는다. 피아노에서 글로 옮겨간 게 무슨 잘못이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 피아노 안 쳐도 괜찮다. 지금 글이 쏟아지면 마음껏 글을 써라. 네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진실하게 찾아 표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글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슬슬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 유화도구를 사들이고 자신의 방에 캔버스를 세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글이 안 되니 그림으로 도피했다는 꾸중이었다.

스승은 마치 귀신처럼 제자의 속마음을 꿰뚫어봤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전통문양 중 세 종류를 1000장씩 그려 오라는 문책성 숙제가 내려졌고 그렇게 해서 똑같은 문양이 반복된 자그마한 스케치북 30여 권이 만들어졌다.

분 명 공부가 틀림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아 스스로 고민하고 과제를 수행하며 매진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고 무엇이랴. 하지만 진도를 정해 놓고 진학 혹은 취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책을 독파하고 시험을 준비하는 이른바 제도권 교육에 익숙한 처지론 그 한계 없음과 자유분방함이 퍽 인상적이면서도 또 어리둥절했다.

“여기는 정신을 깨우는 곳이에요.” 음악만 가르치는 게 아니냐, 그림과 글까지 어떻게 가르치느냐, 점점 늘어나는 학생을 혼자 감당하겠느냐는 질문 공세에 임동창은 간단히 대꾸할 따름이었다.

“ 뭐든지 다 가르칠 수 있어요. 백 명이든 만 명이든 상관없어. 가르친다는 문제를 기술과 기예를 연습시키는 걸로만 생각하니까 자꾸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배우고 가르친다는 의미 자체를 완전히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투욱 하고 터지면 돼요. 툭 터지면 끝나는 거예요.” 임동창은 마치 선문답 같은 교육론을, 그의 말마따나 툭 하고 던졌다.

묘하게 미치고, 완전히 미치고, 가끔 미치고


지 금 바로 그 ‘툭 터지는’ 공부를 한다고 초등학생, 중고생, 대학생, 대학졸업생 등 11세부터 31세까지 25명의 학생이 서천의 ‘임동창 학교’에 모여 있다. 공식 명칭은 ‘동강중학교 방과후 학교’지만 수강료 무료, 입학요건 전무, 하루 종일 개방으로 운영된다. 매주 새로운 학생이 찾아오니 그새 학생 수가 늘었을지 모른다.

묘하게 미친 듯하다는 ‘묘미듯’ 반, 완전히 미친 듯하다는 ‘완미듯’ 반, 적당히 미친 듯하다는 ‘적미듯’ 반, 가끔 미친 듯하다는 ‘가미듯’ 반, 그리고 외부에서 미친 듯하다는 ‘외미듯’ 반까지 배우는 내용뿐 아니라 학급 이름도 희한하다. 재미있는 작명의 주인공도 임동창이다.

그 의 비서이자 조교를 겸하는 심성희(31)와 도혜가 묘미듯 반의 구성원이다. 둘은 피아노 전공자가 아니다. 그래서 임동창은 “묘하게 미쳤다”고 불렀다. ‘완미듯’ 8명은 학교 혹은 직장을 쉬거나 아예 그만두고 서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 적미듯’은 학교를 다니면서 매일 저녁 피아노 연습을 하고 ‘가미듯’은 가까이는 군산부터 멀리는 서울에서 서천으로 주말에만 내려와 레슨을 받고 연습한다. 그리고 멀리 전남 화순에 사는 콘트라 베이스 연주자 한 명이 ‘외미듯’의 구성원이다. 임동창은 ‘외미듯’ 반 한 명을 위해 먼 여행도 서슴지 않는다.

대부분 피아노를 전공하거나 전공하려는 학생이 많지만 아무도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보통 레슨이라고 하면 예고나 예술대학에 목적을 두지만 여기 애들은 그렇지 않아요. 피아노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즐겁게 배우고 싶어 온 아이들”이라고 심성희는 말했다.

임동창의 학교는 전공이 뭐든 나이가 몇이든 무슨 공부가 하고 싶든 누구나 환영한다. “지금 있는 애들은 음악을 하지만 사실 음악이 제일 재미있는지, 다른 게 더 재미있는지 아직 잘 몰라요. 음악을 하다가 다른 것을 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이 학교를 그저 음악학교로만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이 되라는 강요 없이 오로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찾기 위한 무한대의 감수성을 개발하는 학교라 부르면 올바른 표현일까?

학 생들은 하루 종일 피아노를 치고 점심은 동강중학교 식당에서 급식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함께 지어 먹는다. 요일마다 돌아가면서 요리를 하고, 만들기에 자신 없는 남학생들은 설거지를 한다. “체크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모두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한다”고 심성희는 말했다. 지난 9월에 학교 문을 열었으니 이제 3개월 남짓이지만 아이들은 벌써 공동체 생활에 익숙해졌다.

다 른 데서 받는 레슨과 어떤 점이 다르냐는 질문에 초등학생 문승수(11)는 “대전이랑 서울로도 레슨을 받으러 다녀봤지만 하기 싫은 것도 선생님이 하라면 해야 하니까 정말 지겨웠거든요. 완전히 달라요. 여기서는 정말 살맛이 나요. 내가 하고 싶은 곡을 연습하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이 나한테 잘 맞는 곡을 정해 주시니까 그것도 너무 좋아요.”

전화기 너머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원래부터 그렇게 말을 잘했느냐 묻자 이 당돌한 초등학생은 “일곱 살 때 검도를 그만두고 나서 좀 자신감이 없어진 것 같았거든요? 근데 선생님 만나고 자신감이 충천해졌다”고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임동창 음악학교의 조교인 김현숙(26)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완미듯’ 반에 들어왔다. “교수님들은 내가 느끼는 대로 치면 항상 촌스럽다고 했어요. 근데 임 선생님은 네 안의 것이 너무나도 귀중하다, 그걸 잘 갈고닦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그냥 느끼는 대로 해 보라는 선생님의 격려에 힘입어 작곡도 시작했다. “한 번도 작곡을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근데 해 보라고 해서 하니까 되더라고요. ‘아, 나도 할 수 있구나.’ 너무 신기했어요.” 나만의 음악을 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던 현숙은 이제 연주보다 작곡 쪽으로 전망을 잡아나가는 중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기 전에 두 번의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피아노 조교인 현숙이 악보를 제대로 읽었는지, 완벽하게 외웠는지를 점검한다. 거기서 통과해야 임동창의 레슨을 신청할 수 있다.

레슨은 아이들이 편한 시간에 맞춰진다. 학교 레슨실로 선생님이 가거나 혹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선생님 집으로 아이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레슨은 평일, 토요일, 일요일 구분이 없다.

우리는 모두 천재다


대부분 임동창 하면 괴짜 혹은 기인을 떠올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교육자 임동창의 역사가 수십 년에 이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취 미라면 모를까 평생 피아노로 먹고살기엔 터무니없이 늦은 나이인 15세에 처음 피아노를 만났다. 형편이 어려워 독학으로 무작정 피아노를 쳤다. 바이엘, 체르니를 혼자서 배웠다. 음악실에 아예 이불을 갖다 놓고 친구들 도시락을 뺏어먹으며 학교에서 살았다.

미 친 듯 1년을 보내고 나자 학예발표회 때 독주를 하라는 선생님 지시가 내려졌다. 날아갈 듯 기뻐 더욱 열심히 연습을 했다. 하지만 금세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해도 레코드에 나오는 음색을 똑같이 낼 수 없었다. 겨우 1년의 연습에 터무니없는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소년 임동창은 소리를 갈고닦고 짜맞추는 녹음기술을 전혀 몰랐다. 순진한 소년은 레코드 소리를 무대에서도 그대로 구현해 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미 칠 듯 답답한 마음에 음악선생님을 찾아 무작정 군산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평생의 스승 이길환 선생님을 만났다. 임동창의 천재성을 알아본 스승은 돈도 받지 않고 숙식을 대줘가며 마음껏 피아노를 치게 했다. 그리고 “고1 때부터 운명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스승의 조교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말하자면 교육자 임동창의 첫출발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나도 여느 선생들이나 매한가지였어요. 열심히 하고 잘 치는 놈은 예쁘고 좀 못 치고 게으름 피우는 놈은 밉고 그랬지요.”

레코드 소리의 비밀은 여전히 미궁이었다. 하루 16시간씩 피아노 페달에 구멍이 날 정도로 지독한 수련에 들어갔다. 그렇게 매진하던 어느 날 갑자기, 순간적으로 “툭 하고 터졌다”고 임동창은 말했다.

“그건 터득이 아니에요. 그냥 터져 나와 연주가 되고 재생이 되는 거지. 아, 이거였구나. 내 안에 이미 다 돼 있었구나.” 그는 재차 강조해 말했다.

“음악이라는 건 그냥 툭 터지면 끝나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면, 진정한 실력은 이미 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무조건 따라 하고 연습해서 절대 되는 게 아니에요.”

그 러고 나자 가르치던 아이들 모두가 천재로 보였다고 한다. “ 그 한 찰나가 있은 후, 그 다음에 보니까 애들이 그냥 다 예뻐 보이더라고. 전부 천재야. 누구 하나 떨어지는 사람이 없어요. 똑 같은 천재예요. 그때 비로소 알았어요. 아, 배우는 놈이 문제가 아니라 가르치는 놈이 문제였구나!”

그는 악보를 경전처럼 숭배하는 서양 클래식 문화가 우리의 음악교육을 얼마나 망쳐왔는지, 연습이라는 미명 하에 똑같이 흉내만 내는 훈련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감수성을 얼마나 손상시켜 왔는지 역설했다. 그렇다고 학습 과정을 절대 경시하지는 않는다.

임동창식 교육론에 따르면 기술과 기예의 연마는 배우는 자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되는 문제고, 배우는 자의 정신을 깨우고 점검하는 일이 바로 가르치는 자의 몫이 된다.

“ 뭐 하나를 제대로 해서 툭 터지는 날까지 가야 해요. 하지만 툭 안 터져도 이렇게 시작만 해도 사람들은 행복해 해.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게 보이기 시작하니까. 이론으로 지식으로 아무리 무장해도 의미가 없어요. 이론이나 지식은 자기 삶을 변화시키지 못해.”

반나절 만남이 아쉬워 다시 서천을 찾았을 때 마침 새로운 학생이 왔다고 했다. 동강중학교 3층에 마련된 방 아홉 개짜리 연습실로 향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대학교 졸업반 여학생이었다. 그가 피아노 앞에 앉자 나머지 아이들도 연습실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몇 소절 치지 않아 임동창이 그만하라고 멈춰 세웠다. 영문을 모른 그 여학생은 다른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으로 와서 함께 앉았다.

임동창이 왜 레슨을 받으러 여기까지 왔는지 묻자 아이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아노를 너무 좋아했지만 학교나 교수의 부당한 처사를 겪다 보니 그 좋던 피아노까지 싫어졌노라며 속내를 털어놓다 눈물바람을 했다.

둘 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레슨이라기보다는 인생상담이었다. “맞아요. 나는 카운슬러예요, 카운슬러”라고 임동창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학생 하나하나마다 그날그날 어떻게 레슨을 했는지 모두 기록한다. 조교 도혜가 노트북을 들고 쫓아다니며 선생님과 학생들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를 받아 적어 일지를 만든다.

살짝 들여다본 일지 속에는 울고 웃고 혼내고 칭찬하고 심지어 학생과 선생의 개인사와 집안사까지 등장하는 진솔한 고백과 가르침이 녹아 있었다. 이런 열성은 동강중학교 선생님들까지 혀를 내두른다.

“우리도 가르쳐봐서 알지만 오후만 돼도 목이 잠기고 힘들거든요. 그런데 임 선생님은 하루 종일 수업을 하시는데 아침 9시나 밤 10시나 한결같아서 정말 놀랐다”고 영어를 가르치는 김가빈 교사는 말했다.

“ 서천에 와서 발견한 게 있어요. 지금 이 땅 한국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문제는 바로 부모자식 간의 소통이 안 된다는 데 원인이 있어요. 초·중·고·대학생 모두 마찬가지예요. 서로 소통이 안 되는데 그냥 되는 척만 하고 사는 거죠.”

임동창은 부모자식 간에 소통이 이뤄지면 다른 모든 소통도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이들의 부모를 꼭 만나본다. 서천학교의 1번 제자인 도혜의 부모도 방문 대상이었다. 전주로 내려가 이야기를 나누니 자연스레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제는 부모가 더 나서서 임동창을 선생님으로 모시겠다고 한단다.

도혜의 아버지 송상섭 전북대 전자정보공학부 교수는 “선생님을 만나고 나 스스로 태도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학과 공부 말고 다른 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별로 좋게 안 봤는데 요즘은 관심 있게 지켜보고 격려도 해요. 덕분에 학생들이 전에 없이 상담을 하고 싶다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 기분이 좋다”며 웃었다.

또 임동창은 그저 막연히 아버지가 싫다는 아이에게 왜 싫은지 직접 글로 써보라고 시키고, 심성은 착하지만 말을 함부로 해서 별 이유 없이 미움을 사던 아이와 싸움을 해 가며 원인을 찾아나갔다. 아이 자신도 몰랐던 속내가 밖으로 풀어 헤쳐지자 음악이, 연주가 바뀌었다.

“음악은 음악 홀로 존재할 수가 없어요. 음악과 삶은 하납니다. 본디 에너지란 하나여서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지요.” 그래서 임동창의 음악학교는 생활공동체다. 음식을 지어 먹고 청소를 하고 그 모든 생활이 음악을 배우는 교육인 셈이다.

“아이들이 음식을 하면서 뭔가를 빠뜨렸거나 실수를 하면 ‘아, 내가 섬세하지를 못해’라고 농담처럼 그러거든요. 삶 자체가 바뀌어야 소리도 바뀌고 연주도 바뀐다는 선생님 말씀을 이제는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하는 것 같다”고 심성희는 말했다.

임동창의 지인들은 그가 전에 비해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다. “전에는 사람들이 내 옆에 오면 다 타 죽었어. 내가 너무 활활 타오르니까. 그래서 가르치는 일은 계속했지만 열매를 못 맺었어. 산발적으로만 가르쳤지.”

그는 툭 터진 후 지금까지, 남녀노소, 학벌에 상관없이 다양한 학생을 가르쳤다. 때로는 서울대 음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고, 때로는 아예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먹이고 재워가며 피아노를 가르치고 국악을 가르쳤다.

임동창의 표현대로 하자면 교육자로서 폭넓은 임상시험을 한 셈이었다. 사람들은 제도권의 정규교육이 풀어주지 못하는 부분을 임동창을 통해 해소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 별의별 사람 다 가르쳐봤어요. 짱돌머리부터 서울대 수석까지. 그 많은 사람을 다 가르쳐보고 내린 결론이 뭔 줄 알아요? 음악에 대한 사랑이 없더라…. 사랑이 없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음악이 안 되더라…. 명예도 얻고 돈도 얻지만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아요.”

그런 그들 향해 임동창은 사랑을 모르는 불감증 환자라고 했다. “결론은 ‘사랑이 없더라’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사랑을 회복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공부는 그것밖에 없어.”

무엇보다 다시 교육에 집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이후 삼십 년을 부여잡은 화두가 해결됐기 때문이다. 이길환 선생 댁에서 기숙하며 작곡공부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댕댕댕 울리는 세 번의 괘종소리를 들은 후 출가를 결심했다고 했다.

분명 스승은 괘종시계가 열두 번을 울었다고 했지만 임동창에게는 정확히 세 번이었다. 뭔가에 집중해 앞선 아홉 번을 듣지 못한 탓이었다.

“ 내 고막은 열두 번을 진동했는데 왜 나는 세 번밖에 못 들었을까? 아, 이 귓구멍을 통해 듣는 놈이 따로 있구나. 눈구멍을 통해 보는 놈이 따로 있구나. 이게 진짜 나구나. 그럼 진짜 내가 어디에 있느냐? 육신이 자동차라면 그 안에서 핸들을 조정하는 이 운전기사, 이놈이 진짜 나구나. 이걸 알아야 음악을 쓰겠구나.” 기독교, 가톨릭, 원불교. 안 찾아가본 곳이 없다고 했다. 그렇게 진정한 ‘나’를 찾아 출가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된 이 화두는 우리 민족음악의 탐구로 이어졌다. 임동창의 탐구는 서양클래식, 국악, 대중음악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음악을 흡수하고 소화시켜 배출하는 과정을 거쳐 하나의 점으로 수렴됐다. 바로 향악의 현대화 작업이다. “정확히 30년이 걸렸다”고 그는 말했다. 수제천·가곡·영산회상·여민락·대취타가 임동창을 거쳐 현대의 음악으로 재탄생했다. 악보 출판과 음반 녹음만 남겨놓았다.

“그렇게 작업을 다 마치고 나니 허무가 찾아옵디다. 허무는 근본이에요. 텅 비워진 거지. 슬픔도 외로움도 아니야. 원래 싹은 텅 비워진 속에서 올라오는 거거든. 가르칠까 말까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 그러다 도혜랑 딱 인연이 됐지. 욕심껏 자기 것을 찾아보겠다는 이 녀석을 만나면서 ‘아, 인제 되겠구나. 인제 결실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또 한 번 운명처럼, 올 3월 서천군청에서 마련한 서천문화학당 공개강의를 하게 됐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행사를 준비했던 서울의 기획사 직원이 실수로 강의를 철회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서천에 내려왔다고 한다. 공개강의는 주민 300명 이상이 모여 성황리에 끝났다.

화두 풀고 만난 서천


사 실은 공개강의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천군청 직원 한 명이 임동창을 붙잡고 늘어졌다. 바로 홍성언 주민생활지원과장이다. 그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예찬한 임동창의 강의에 감명을 받은 후 곧장 그를 쫓아 진안으로 내려갔다. 당시 임동창은 전국을 돌아다니다 전북 진안에 잠시 머물 때였다.

“주민복지 업무를 하다 보니 유치원, 청소년, 여성, 노인, 장애인, 영세민 문제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애들은 죄다 과외에 묶여 살지, 시골 사람들은 박탈감에 사로잡혀 있지, 특히 청소년들은 일류대학도 못 가고 지방에 사니 더 자신감이 없어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 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임 선생을 만난 겁니다.”

홍 과장은 임동창에게 서천군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청소년 강의가 가장 어렵고 또 지속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임동창의 거절에 홍 과장은 “그럼 그런 교육을 서천에서 해 보자”고 밀어붙였다. 그 역시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 교회성가대가 가장 부러웠다”고 홍 과장은 말했다.

형편 때문에 못 배웠던 음악공부를 공무원이 되고 나서 시작했다. 마흔 살이 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논산에 가서 지휘기법과 성악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교회에 합주단도 만들었다. “고등학생, 중학생이랑 같이 놀았죠. 지금은 다 대학원 나오고 교향악단 단원도 되고 시집도 가고 그랬어요.”

그는 문화선진국이 돼야 3만 달러, 4만 달러 시대가 열린다고 힘줘 말했다. “일류대학만 인생의 목표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서 건강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면 되지요. 이제 한 단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이 음주가무에 강하지 않습니까? 문화에 강한 민족이지요. 그 잠재력을 개발하고 미래를 개척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임 선생과 주파수가 맞았어요. 애들한테 희망을 주자, 우리 청소년들의 잠재력을 깨우면 희망이 생긴다고 말입니다.”

마치 꿈을 꾸듯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밝히는 홍 과장의 모습은 공무원이라는 세 글자가 주는 편견을 여지 없이 무너뜨렸다. 3월 공개강의 후 홍성언과 임동창은 서천과 진안을 왕래하며 열띤 대화를 나눴다.

‘주파수가 맞았던’ 그들의 작업은 일사천리였다. “내가 이 양반 때문에 이렇게 됐다니까.” 홍 과장과 마주 앉은 임동창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열정이 임동창을 서천에 들어앉힌 셈이었다.

5 월 20일에는 공개레슨이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1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했고 임동창은 아예 짐을 싸 들고 서천에 정착했다. “임 선생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예산이 없어 강사료도 못 드렸습니다. 숙박비만 겨우 드렸죠. 순수한 열의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8월 1일부터 보름 동안 여름캠프를 열었다.

서천 아이들은 20만원, 외지 아이들은 40만원을 냈다. 여느 음악캠프에 비하면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이었다. 시설이 없어 아이들은 직접 피아노를 빌리거나 가져와야 했다. 서천문화원이 청소년 문화사업비 1200만원을 내놔 아이들을 동강중학교 교실에 재우며 밥을 먹이고 가르쳤다.

그 리고 올 9월 3일, 동강중학교에 임동창 음악학교가 개교했다. 서천군청은 청소년 음악영재사업이라는 사업명으로 예산 1억원을 확보해 피아노 9대를 구입하고 동강중학교에 레슨실을 마련했다. 여관 신세를 지며 공개레슨을 했던 임동창도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제자 몇몇과 함께 머물 만한 숙소가 생겼다.

아직 걸음마 단계이긴 하지만 모두들 희망에 부풀어 있다. 개교 1주년이 되는 내년 9월 3일에는 성대한 발표회도 열 계획이다.

“ 지금은 모르지. 아이들 돼가는 거 봐서, 공부하는 걸 봐서 맞춰야지. 개인의 성취 없이 공동작업만 해도 안 되고 공동작업은 안 하고 개인의 성취만 하면 심심하고, 그 두 가지를 같이 해야 한다”고 임동창은 말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여러 가지로 아주 잘되고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잘될 일만 남았어.”

서천군은 임동창 음악학교를 키우려고 정부지원을 요청할 계획이다. 장차 기숙사와 공연장, 연습실을 고루 갖춘 전통적 의미의 학숙(學宿)을 만든다는 목표다. “이 사업은 내면을 깨우는 교육인 만큼 전념하고 몰두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일반학교에서 10년 배울 걸 3분의 1, 4분의 1로 단축하고 새로운 창작도 가능하다”고 홍 과장은 말했다.

1시간 남짓 발표회를 마친 도혜는 지난 1년을 지켜봐준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은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하지만 솔직히, 피아노도 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지만 아직 딱 뭔지는 모르겠어요.”

그럼 1년의 고민이 헛되지 않으냐는 질문에 도혜는 이렇게 답했다. “순간순간 정말 행복을 맛봤어요. 행복이 뭔지 그렇게 확실히 맛봤는데 어떻게 옛날로 돌아가겠어요? 절대 안 되죠.” 우문에 현답이다. 평생의 스승을 만나는 행운은 어쩌면 용감한 제자들에게만 찾아오는 선물인지 모른다. 지금 서천에 용감한 자들의 아름다운 꿈이 무르익어간다.
이정명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ikke@joongang.co.kr